오바댜서는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침략당할 때,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하며, 바벨론을 도와서 예루살렘을 약탈했던 에돔족속을 하나님께서 징벌하실 것에 대해 선포하고 있는 책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에돔족속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하고, 그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멸망을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라도 죄악으로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의 멸망 또한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 도시에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아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악한 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들이 멸망하는 것 또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들이 그 악으로부터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그 누구를 향해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마치 자녀가 아무리 악하다하여도 부모는 포기하지 않고, 자녀가 돌이키기를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인생이 악으로부터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더욱 구체화되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조롱하며, 죽이는 자들을 향해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악한 이들이 벌을 받으면 기뻐합니다. 박수치며 환호합니다. 잘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너무 무자비하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것이 ‘정의’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정의는 잘못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다시 그러한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그와같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아에게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정의가 그 사회에 가득차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정의가 가득차서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사랑에 기초해야 합니다. 끊고, 자르고, 정죄하는 정의만으로는 흐를 수 없습니다. 더욱 냉정하고, 삭막하고, 단절될 뿐입니다. 인생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자만이 사랑을 기초로한 정의를 흐르게 할 수 있습니다. 행여, 나는 너무 쉽게 정죄하고, 내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실패와 무너짐을 보고 너무 기뻐하며, 쾌재를 부른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돌아오기를 바라는데 말입니다. 그 분의 끝없는 은혜와 사랑앞에 다시 한 번 머리 숙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께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아버지의 마음을 갖게 도와 주옵소서.' |